02. 책과 사람 사이

곡을 완성한 후 한 번 들어보시라고 간단히 녹음했던 데모 버전이지만 정식 버전이 만들어지지 않은 채 널리 유통됨


청주에 와서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에서 활동을 시작한 게 아마 2012년이었을 것이다. 공룡에 와서는, 그동안 미디어 운동이란 것을 하면서 내가 막연히 상상하기만 했던 음악을 매개로 한 활동들을 실행에 옮겨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건, 그저 내가 훌륭한 음악을 만들고 음악가로 인정받는다거나, 아니면 단순히 기회가 충분치 않았던 재능있는 사람들이 음악을 만들어 볼 수 있게 도와준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상상하던 건 음악이, 혹은 예술이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위대한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소외된 목소리를 드러내고 번역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며 그 활동 자체로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삶의 방식이란 게 어떤 것일지 보여줄 수 있는 (…중략…) 나는 주로 공룡에서 운영하는 마을까페를 지키면서, 음식과 음료를 만들고 청소를 하면서 공룡에서 하는 활동들이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빈 부분을 채우는 역할을 했다. 그러던 중에 갑작스레 땡땡책협동조합(이하 땡땡책)1이란 곳의 조합가를 만들어 달라는 제의를 받았고 갑자기 곡을 쓰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갈수록 책을 많이 안 읽는다. 살면서 하는 어느 정도 쓸모있는 활동엔 크든 작든 에너지가 소요되는 것 같은데, 워낙에도 많지 않던 에너지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없어지면서 내 생활에서 독서라는 활동은 순위권 밖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땡땡책이라는 곳을 알게 되었을 때도 별다른 감흥을 받거나 정리된 생각이 떠오르진 않았다. 그래도 노래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고 어쨌든 내가 잘 모르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야 하니, 그동안 땡땡책 준비모임에서 만든 소식지 등을 모아서 일단 열심히 읽었다. 다른 거 안 하면서 노래 만드는 데에만 일주일 정도를 쓴 것 같은데, 그중에 5일가량은 계속 그 자료들을 읽고, 생각나는 것들을 이런저런 말들로 적으면서 노래가 될 만한 이야기가 떠오를 때까지 두서없는 메모들을 쌓아 나갔다. 이것은 이 이후에도 내가 노래를 만드는 주된 방식이 된 것 같다. 땡땡책 조합가를 만들기 전엔 한동안 노래를 거의 쓰지 않았다. 시도는 좀 해봤던 것 같고, 가사를 쓰기도 했고, 나온 곡도 없진 않은데, 아주 마음에 들진 않았다. 내가 도스토예프스키도 아니고 한 사람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야기의 범위란 게 너무 한정되어 있었고, 결국은 내가 늘 하던 하소연을 늘어놓으며 징징대는 노래가 나와 버려서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기 이전에 내가 들으면서 지친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이 노래의 내용도 땡땡책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에서 옮겨낸 것이니 결국 내 이야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땡땡책의 사람들은 공감할 수 있는, 그 사람들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게 노래로 만들어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이야기였던 것 같다. 다 만들어진 노래를 대강 녹음해서 들려주었을 때 그 사람들이 보여줬던 반응은, 그 전에 간혹 듣던 가사가 좋다거나 멜로디가 좋다거나 노래를 잘한다는 (마지막 것은 물론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떤 칭찬보다 보람이 있었다. 노래를 만든 나에 대한 칭찬도 물론 있었지만, 그 이전에 이런 노래가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래를 만들기 전에 미리 계획한 건 아니었지만, 나는 이 노래를 만들면서 내가 막연히 상상했던 음악을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 노래는 결국 나의 이야기이긴 하다. 땡땡책에서 했고 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던 많은 활동들(함께 모여 책 읽기, 출판 노동과 유통에 대한 문제 제기와 대안 만들기, 사회적 이슈에 대한 책 만들기 등)을 살펴보며,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내가 느꼈던 외로움을 떠올렸다. 음악은 어쩌다 보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삶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었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부분은 미미했다. 그렇다 보니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음악과 여기에 대한 내 생각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려는 시도는 보통 부담스러운 징징거림으로 귀결되었던 것 같다. 내가 거창한 단어들을 동원해 가며 상상했던 것들은, 결국 이런 외로움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나왔던 것 같다. 그리고 땡땡책의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기엔 나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만나서 담백하게 몸을 움직였다. 그렇게 해서 실현된 일들은 (애초에 상상했던 것과는 좀 다르다고 해도) 실제로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그걸 지켜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힘이 되었다. 그건 더는 징징거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혹시 나와 같은 책을 손에 든 사람을 만나도
다가서서 말을 걸면 미친놈 취급을 받겠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소중한 친구가 늘어갈수록
내가 읽는 책이 나를 점점 더 외롭게 만들어

저 사람들도 나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더라도
함께 읽는 이 책이 우리가 우리의 삶을 바라보게 한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겁내지 말고 말하고
할 수 있는 걸 하고
만들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야지

소중한 걸 잔뜩 껴안고
내 집 구석에서 잠들진 않겠다
무기력한 흥분을 딛고 얻어낸 책과 사람 사이에 있는 무언가

읽는 동안엔 세상이 온통 뒤집힐 것 같아도
읽고 나면 원래 아무 일도 없었단 듯 그대로
책 파는 장사꾼의 통장에 잔고가 늘어갈 동안
그걸 만든 사람들은 시달리다 내팽개쳐져
어디서 주워들은 혁명의 기억이 늘어갈 동안
내가 읽는 책이 나를 점점 더 바보로 만들어

아는 것만으로는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함께 읽는 이 책이 우리의 무거운 몸을 움직이게 한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말할 수 있는 것을 겁내지 말고 말하고
할 수 있는 걸 하고
만들 수 있는 것을 만들어 내야지

아름다운 꿈을 꾸고서
같은 삶으로 돌아가진 않겠다
다채로운 무감각을 뚫고 움켜쥔 책과 사람 사이에 있는 무언가


  1. 땡땡책협동조합은 “함께 책 읽기를 바탕으로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이웃과 연대하며 자율과 자치를 추구하는 독서 공동체로, 건강한 노동으로 책을 만들고 합당한 방식으로 나눌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간다.”는 목표를 가지고 독서모임과 책을 통한 혹은 책과 관련된 연대활동, 도서 제작 및 유통 등의 활동을 하고 있는 협동조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