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 소개

<시킨 건 곧잘 한다>는 내가 지난 몇 년간 가뭄에 콩 나듯이 만들었던 노래 몇 곡을 모아서 다시 녹음한 음반이다. 모인 노래 중 대부분은 그때그때 있었던 (끓어오르는 예술혼 내지는 시대의 부름 같은 두루뭉술한 것 말고,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필요나 요청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 필요와 요청의 많은 부분은 지금 내가 활동가로 살고 있는 생활교육공동체 공룡(이하 공룡)1이라는 단체와 어떻게든 관련이 되어 있다.

지난 몇 년간 노래를 몇 곡 만들었는데, 정말이지 가뭄에 콩 나듯 만들었다. 그래서 내 노래에 관심 가져주신 몇몇 고마운 분들로부터 ‘신곡은 언제 나오느냐’라는 황송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무성의한 핑계의 대표주자인 ‘바빠서’를 정성 들여 길게 늘인 장문의 대답들을 얼버무린 후 미소 짓곤 했다. 정말 바빴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지만, 아마 음악을 많이 만들지 못했던 건 그 바쁘거나 바쁘지 않은 일 중에 음악이 포함되어야 할 필요가 적어서 그랬을 것이다. 꽤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게 (칭찬이나 막연한 기대를 넘어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물론 음악이란 게 기본적으로 먹고사는 데에 큰 쓸모가 없는 일이긴 하고, 그런데도 먹고 사는 사람들 틈에 남아서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의 내 역할을 늘려나가고 싶다면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기대하기 전에 내가 스스로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게을러서인지 겁이 많아서인지 몰라도, 살면서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서 스스로 뭔가를 시도하고 움직인 경우가 많진 않은 것 같다. 그나마 공룡에서 일하고 살면서 고맙게도 내가 별다른 뭔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만들어야 할 구체적인 필요가 생겼고, 덕분에 내 상상 속에서 흐릿하고 과장된 모습으로만 존재하던 노래들이 현실적인 뭔가가 되어 사람들 틈에 머무를 수 있었으며, 이제 이 노래들이 꽤 모여서 좀 짧긴 하지만 그래도 음반이란 형태로 묶이게 되었다.

이 음반에 실린 노래들 대부분은 애초에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필요나 요청으로 만들어졌다. 이 음반을 만드는 것도 음반을 팔아서 활동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필요가 없었다면 진행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음반에 들어갈 음원을 만드는 동안에는 주어진 필요를 넘어서 좀 더 내 욕심을 부렸다. 이미 멜로디와 가사가 있고 그게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그냥 기타 반주랑 보컬만 녹음해도 될 것을, 어떻게 하는 건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런저런 소리를 만들어서 채워 넣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은 아주 훌륭하진 않더라도, 사실 나는 이런 식의 음악들이 만들고 싶었던 거라고 사람들에게 좀 더 잘 설명할 수 있을 정도는 될 것 같다. 물론 사람들의 기대랑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해버린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좀 걱정되긴 한다. ‘가사만 잘 들리면 되는데 귀에 거슬리는 잡다한 소리가 많이 들어갔다’든지, ‘뭘 하려고 했는진 알겠지만 이번엔 잘 안된 것 같다’ 정도의 반응을 상상하고 있다. 사실 어떤 반응을 접하든 일단 뭐라도 만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이 음반을 만드는 동안은 다른 어느 때보다 힘들었고, 고립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남이 시키지 않은 걸 혼자 알아서 하는 게 이렇게 힘든 줄을 서른다섯 먹고 알게 되었다. 크게 눈에 띄지 않는 우여곡절을 거쳐, 일단 뭐라도 만들어 내게 되어 다행이다.

이 음반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던져준 필요와 요청을 넘어서 좀 더 내 마음대로 만들었다. 결과물에 대해 좋은 평가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음악이 만들고 싶으니 이런 나를 필요로 해달라고 떼를 써 본 적이 지금까지는 별로 없는 것 같아서, 혹시 잘 안되더라도 이번 한 번은 좀 그래 보려고 한다. 나는 이런 음악이 하고 싶은 사람이니, 내게 이런 음악을 만들라고 요구해 달라. 물론 훌륭하고 고급스럽고 압도적인 뭔가를 만들어 내진 못 하겠지만, 그래도 시킨 건 곧잘 한다.


  1. ‘공부해서 용 되자’의 줄인 말인 공룡은 청주시 사직동이라는 동네에 살면서 서로 하고 싶은 것과 필요한 것을 찾고, 배우고, 가르치고, 만들어가는 과정을 함께 하는, 그게 공부라고 생각하는 생활교육공동체이다. 그래서 같이 농사도 짓고, 밥도 해 먹고, 공부도 하고, 이것저것 재밌고 필요한 일들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