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다리에 사는 사람

2024-10-05 ~ 2024-10-27, 인천 삼성서림

인천 배다리 지역의 몇몇 장소들과 그곳의 사람들을 한 달 동안 촬영하고, 그 영상과 소리를 확률적으로 변조하여 만든 음악을 배다리에 위치한 헌책방인 삼성서림에 설치된 모니터와 스피커를 통해 재생하였다. 그리고 촬영 기간 동안에 기록한 촬영일지를 소책자로 만들어 전시 공간에 함께 비치해 두었다. 또한 헌책방 안에 센서를 설치하여, 사람들의 움직임에 따라 음악이 진행을 멈추거나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소리와 영상의 변조에는 각각 SuperCollider와 P5.js가, 센서의 제작과 프로그래밍엔 Lolin D1 mini 보드와 Arduino가 사용되었다.

삼성서림의 사장님 부부도 전시에 함께 참여하였다. 한 분은 전시에 사용된 스피커를 직접 제작하고, 스피커, 모니터, 센서를 서점에 설치하는 작업을 해주셨다. 또 한 분은 촬영일지에 들어간 삽화를 그려주셨다.

전시 소개

배다리에 사는 사람 - 촬영일지

*이 전시는 인천 동구청에서 지원하고 패치워크가 주관한 공공예술 프로젝트인 <배다리 인디펜던트>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전시 소개

나는 몇 년 전부터 인천의 배다리라는 동네에 살면서 헌책방에서 일을 하고 있다. 동네를 아주 활발히 돌아다니거나 사람을 사귀려 노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동네에 어느 정도 머무르다 보면 자주 마주치면서 얼굴을 익히는 사람들이 생기고 그 중 몇몇과는 가끔 인사를 나누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내가 배다리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이전에 쉽게 떠올렸던 전형적인 헌책방 손님이나 골목에 사는 노인들의 모습과는 좀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된 골목이나 가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내가 배다리에서 가장 자주 만났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정작 그 이야기에 잘 들어맞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반면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가 한다는 게 되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이 동네의 사람들과 겨우 얼굴 정도를 아는 관계이고, 그들 각각의 인생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 삶에 대해 뭘 아는 것처럼 함부로 떠드는 것은 꽤 무례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꼭 필요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이 사람들이 나한테 자기 삶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의 삶은 어떤 크고 권위있는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더라도 별 탈 없이 잘 흘러갈 것이다. 나 혹은 나와 동류의 어떤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고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삶을 번역해내고 싶다는 것은, 사실 그냥 내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이야기를 하는 사람인 나는, 내가 알게된 사람들의 삶이 내 이야기 속에서 아예 없는 것처럼 되어 버리게 놓아둘 순 없다. 나는 아무래도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적어도 내가 왜 이 사람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는지, 혹은 내가 이야기하기를 포기하지 않고도 여전히 이 사람들의 삶에 함께 할수 있을 것인지, 그런 정도의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시를 위해 내가 생활하고 일하는 곳 주변 세 곳의 장소를 골라서 한 달 동안 촬영을 하였다. 촬영된 영상은 전시 장소인 삼성서림 내에 설치된 3 세트의 모니터와 스피커를 통해 무작위로 재생된다. 재생되는 소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천천히 변조되면서 음악으로 바뀌고, 동시에 화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까지 열화된다. 그리고 이렇게 배다리의 사람들과 풍경이 쪼개져서 음악의 재료로 소모되는 과정에 저항할 수 있도록, 서점 내에 센서를 설치하여 손님들의 움직임이 많아지면 소리와 영상의 변조가 멈추거나 처음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여기에 더해, 전시를 위해 촬영하는 과정과 내가 했던 생각들을 좀 더 잘 공유하기 위해 촬영일지를 소책자로 만들어서 비치하였다. 마지막으로 삼성서림의 사장님 부부도 전시에 함께 참여하였다. 한 분은 전시에 사용된 스피커를 직접 제작하고, 스피커, 모니터, 센서를 서점에 설치하는 작업을 해주셨으며. 또 한 분은 촬영일지에 들어간 삽화를 그려주셨다.

이 전시를 보러 온 관객들이 헌책방, 오래된 골목 등의 익숙한 이미지 안에 자리잡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내 삶과 그들의 삶이 연결되어 있음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

동시에, 이 전시에서 보여지는 사람들의 모습은 실제 이들이 사는 삶과 큰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를 아무리 완벽하게 다듬고 사랑해 보아도, 그 안에서 재현될 수 없는 현실의 인간들이 불현듯 시퍼렇게 눈을 뜨고 나타나서 우릴 당황스럽게 할 것이라는 사실을 작가와 관객이 함께 불안해했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꼭 작품이나 전시를 통하는 게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다는 건 대충 다 이런 식인 것 같기도 하다.


배다리에 사는 사람 - 촬영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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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일지 소개»

나는 배다리에 관한 나의 작업에 사용할 소리와 영상을 수집하기 위해 앞으로 한 달 정도 이 근처의 장소들, 사람들을 촬영하기로 했다. 배다리에 머무는 동안은 되도록 매일 촬영을 하고서 그날 있었던 일이나 내가 했던 생각을 일지처럼 쓸 것이다. 이렇게 기록을 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을 또 남기는 것은 작업의 내용 자체와 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왜 이런 기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지 먼저 간단히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가장 걱정이 되었던 것은, 사람들을 찍거나 녹음을 하기 위해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말이야 소외되고 묻힌 존재들을 드러내고 그런 식으로 다 좋게 가져다 붙일 수 있겠지만, 별일 없이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든 가져다가 전시한다는 건 참 무례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사람들에게 이게 뭐 하는 건지 정확히 설명할 수도 없을 어떤 작업을 하기 위해서, 주는 것도 없이 내 카메라와 녹음기에 담겨 달라고 부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늘 부담스러운 일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러므로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일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나는 한 편으로는 헌책방의 손님들이나 동네 할머니들에게 말을 건네고 인터뷰를 하고 바스트샷과 클로즈업샷을 거침없이 찍어내는 멋진 나를 상상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집 밖에 사람 소리가 들릴 때마다 저 사람에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미리 걱정하며 가만히 얼어붙어 있는 그런 상태로 꽤 한참을 지냈다.

그러다가 결국 카메라와 녹음기를 챙겨 들고 집 앞으로 나섰다. 사실 그렇게 한참을 걱정했던 것에 비해서 꽤나 충동적으로, 그냥 밖에서 소리가 들리고 있으니까 한 번은 시험 삼아 찍어봐야겠다는 그 정도 생각만 하고 아무 준비 없이 일단 나갔던 것 같다. 나 있는 곳 건너편에 사시는 폐지 줍는 할머니가 일을 하고 계셨는데, 간단히 상황을 설명하고 촬영을 해도 되겠냐고 여쭤보니 꽤 호의적으로 허락을 해주셨다. 아무래도 바로 앞집에 사시는 분이다 보니 오며 가며 계속 인사는 드리고 그러던 사이여서 좀 더 수월했던 것 같다. 그렇게 해서 그동안 걱정하고 무서워했던 것에 비하면 싱거울 정도로 간단히 1~2분 정도의 첫 촬영을 끝냈다. 그리곤 내친김에 바로 이어서 바로 옆 골목을 또 1~2분 정도 찍고, 마침 강아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시던 동네 할머니께 또 인사를 드리고 허락을 구했다. 이분은 자주 뵙던 분이 아니라 조금 경계를 하시는 듯 느껴졌지만, 역시나 딱히 거절은 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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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첫 촬영에 성공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정도를 생각했던 것 같다. 하나는 실제로 사람들에게 부탁을 했을 때의 반응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거나 혹은 반대인 것이 아니라, 아예 상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앞집 할머니는 내가 말을 걸었을 때 마침 창고 문을 열고 안에 쌓여 있는 고철 더미를 정리하고 계셨는데, 촬영을 해도 되겠냐고 물었을 때 맨 처음 하신 말이 ‘아유 그런데 이게 이렇게 정리가 안돼서 어떡해…’ 였던 것 같다. 그전까지 내 머릿속에서 (내 생각에 소외되고 묻힌 것 같아서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분들은 찍히기 싫다거나 찍히고 싶다는, 둘 중 하나만 말할 수 있거나 두 이야기를 번갈아 가면서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존재가 되어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생각했던 다른 하나는, 이게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힘든데, 내가 이제서야 이 동네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라고 부를만한 것을 형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 자체보다는 카메라와 녹음기를 든 내가 그렇게 빤히 드러나는 것, 뭐 하는 건지 설명할 수 없을 어떤 작업을 하고 싶어 하는 내 진짜 의도가 드러나는 것이 되게 무서웠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나의 이상한 구석을 꽁꽁 숨겨놓는 것을 그만두고 나서야, 나는 그 자리에 놓여있는 것을 넘어서 말과 행동을 주고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된 것 같다. 아마도 앞으로 한 달 동안 촬영을 하면서 이렇게 시작된 관계는 또 조금씩 변할 것이고, 나는 이 사람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던 것을 조금 더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되게 중요한 것 같지만, 이 모든 이야기를 당장 이번 작업에 담을 자신은 없다. 그래서 일지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촬영을 한다고 카메라를 들고 이 골목을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둔해서 잘 모르던 것들을 조금씩 눈치채게 되는 것 같다. 일단은 이 골목의 작은 집들에서 각각 문밖에 놓아둔, 많은 정성이 들어간 화분을 좀 더 잘 보게 되었다. 할머니들은 집 밖에서도 집안일을 하는 것처럼 화분을 키우고, 그것들이 모여서 이 골목의 모습을 만든다. 내가 키우는 식물은 잘 죽어서 나는 화분을 키울 자신은 없지만, 일단 아쉬운 대로 빗자루질이라도 좀 해야 하지 않겠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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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7»

오늘부터 배다리에 있는 동안은 매일 촬영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적어도 길에서 자주 뵙던 분들이나 책방에 자주 오는 손님들에게는 내가 하는 일을 간단히 설명하고 허락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집 앞 골목을 너무 지저분하지 않게 청소할 것이다. 일단 셋 중에선 청소가 제일 쉬웠기 때문에 빗자루질을 먼저 했다.

미리 점찍었던 장소들을 또 찍었다. 집 근처 골목 몇 군데, 서점 근처 큰길, 서점 안, 공사장 근처의 임시 도로, 일단은 이 정도. 골목은 일요일이라 그런지 한산했고 TV 소리가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큰길은 역시나 차 소리가 제일 많이 났고, 서점에는 마침 있던 모르는 손님 두 분에게 간단히 촬영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촬영 중은 아니었지만, 전에 만난 강아지 산책시키던 할머니를 두 번 정도 더 마주쳤다. 나 혼자 지레 겁먹은 걸 수 있지만 약간은 불편해하시는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제대로 인사할 타이밍을 한 번 놓쳐서 더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다.

«20240708»

오늘은 빗자루질은 안 하고 쓰레기만 살짝 주웠다. 중학생인지 고등학생인지 아이들이 가끔 골목에 우르르 와서 담배를 피우고 사라지기 때문에, 종종 집 앞에 담배꽁초가 널브러져 있다. 주로 그것들을 주웠다.

비가 많이 온다고 해서 소리를 따기 힘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렇게까지 계속 비가 오진 않는다. 어제까진 뭉그적대다가 오후 늦게 촬영을 하거나 했는데 오늘은 나름 아침 일찍 나가보았다. 서점 앞에 있는 문구점의 아저씨를 자주 뵙지만 제대로 인사를 한 적은 없었는데, 마침 밖에서 일하고 계시길래 인사를 드리고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 우리 집보다 좀 아래쪽에 사시는 다른 할머니가 일 하러 나오신 걸 보고 촬영을 해도 되는지 여쭤보았는데, 불편하다고 하셔서 찍지 않는 것으로 했다. 이 전에도 느낀 거지만 촬영을 허락하시는지 여부를 떠나서, 예상보다 명확하고 구체적인 의사를 표현하시는 경우가 많다. 이 할머니의 경우엔, 정확히 이 단어였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찍히는 게 불편한 것이 ‘초라해서’ 그렇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껏 그분이 초라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초라하다고 말씀하시는 마음을 아예 알 수 없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꼭 이 할머니만이 아니라 나에 대해서 뭔가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다른 사람들도 내가 다 모르는 생각이나 마음을 가지고 있겠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촬영을 원치 않는 이유를 이렇게나 명확하게 말씀해 주신 건 그것 자체로 참 고마운 일인 것 같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작업에서 이분들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야 할지가 다시 한번 헷갈리긴 한다. 이분들이 카메라 앞에서 느끼는 초라함, 찍히기에는 너무 청소가 되지 않았다는 걱정 같은 것에 대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초라해 보이지 않게, 잠시라도 뿌듯해할 수 있게 노력해야 하나, 아니면 사실 전혀 초라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힘줘서 얘기해야 하나. 그렇게 한다면 너무 내 고집 때문에, 내 믿음을 입증하느라 이분들의 부끄러움을 무시해 버리는 일은 아닐까. 예전에 이런 고민에 대해 이런저런 결론을 내리기도 했던 것 같은데, 금방 연기처럼 사라지고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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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9»

오늘은 뭔가 집 밖에서 소리가 들리거나 마침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는 장면을 마주하거나 하는 일들이 몇 번 있었는데, 바로 장비를 들고 달려드는 건 너무 노골적인 것 같단 생각에 망설이다가 또 아무 소리 안 나는 텅 빈 길만 찍게 된 것 같다. 이러면 작업은 어떻게 하려고 이러나. 그래도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목표를 포착하고 돌진하고 그렇게는 못 할 것 같고, 일단 이번 주까지는 카메라를 드는 것에 (그리고 카메라를 든 내 모습을 사람들이 보는 것에) 좀 더 익숙해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뭔가 지금보단 조금 더 정기적이어야 할 것 같다. 되도록 정해진 시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무조건. 목표를 달성하는 영리함보다는 그런 꾸준함이, 뭐라 그래야 하나, 더 맞는 것 같다. 아닐 수도 있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카메라를 들고 큰길로 나가다가 앞집 할머니랑 동선이 겹쳤는데, 이번엔 할머니가 먼저 말을 거셨다. 시장이 닫아서 고춧가루를 사러 어디 멀리로 가야 한다, 에어컨 설치하는 차가 온 거 보니 여기 어느 집에 에어컨을 다나 보다, 이런 이야기들. 대화가 잘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내가 적절한 대답을 잘 못하기도 했고, 목소리가 크지 않아서 할머니가 정확히 못 들으신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그래서 또 뭔가 실수한 것 같고 민망한 느낌이 좀 있었는데, 그래도 불완전하지만 대화라고 부를만한 것이었다. 뭐가 필요해서 시작된 것이 아닌 대화를 이 할머니와 한 건 거의 처음인 것 같다.

오늘도 집 앞을 쓸었고, 옆집 앞에 떨어진 큰 쓰레기 하나도 주웠다. 골목 맨 끝 집의 개가 문을 긁으면서 한참 서럽게 울길래 뭔 일이 났나 했는데, 마침 집 밖으로 나오시는 다른 집 아주머니께 물어봤더니 원래 주인아저씨 나가고 나면 한참을 저런다고 하셨다.

«20240710»

앞집 할머니 친구분이 놀러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데, 햇빛을 피해 우리 집 앞으로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고민하다가 차마 찍진 못하고, 그냥 인사드리고 촬영에 대한 허락만 받아 놓았다. 아주 상쾌한 허락은 아니었고, 뭔가 조금 놀라신 것 같기도 해서 조심스럽다. 두 분이 말씀 나누시는 내용 중에 정확히는 못 들었는데 이 근처 어느 집은 아직 비어있고 누가 이사 오고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어제 에어컨 얘기를 뜬금없이 하신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에 사람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누가 새로 오는지는 중요한 일일 것이다. 동네에 빈집이 많아지는 것은 무서운 일일 것 같다.

우리 집 골목에서 반대쪽 끝 집 앞에 평상이 있는데, 가끔 한두 사람이 거기 앉아 있다. 거기 앉아계신 할머니께 말씀을 드리고 평상을 걸쳐서 조금 촬영을 했다. 할머니는 이 동네 사시는 분은 아니었지만, 젊은 사람이 동네에서 뭔가 한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게 좋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또 그 친절한 대화를 잘 이어 나가진 못한 것 같은데, 그래서 마지막에 인사를 드리고 오면서 살짝 기분이 찝찝했다. 근데 며칠째 이 일지를 쓰면서 보니 난 이런 것에 너무 예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세계 인구가 몇 명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하여튼 세계에 사는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중 99.9% 이상은 나랑 본 적이 없는 사이이다. 원래 사람은 서로 어색한 게 기본값인 것이다.

서점 단골손님 중에 자주 오셔서 한두 권씩 관심 있는 책을 사 가시는 여자분 한 분이 계셔서, 촬영 허락을 일단 받아놓았다. 말도 안 하고 찍는 것보다 이렇게 솔직히 얘기해주는 것이 훨씬 좋다고 하셨다. 그런데 정작 오늘은 서점 촬영은 까먹고 안 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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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1»

오늘은 일이 많아서 촬영에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또 소스라치게 바쁜 건 아니었기 때문에 오전 시간에 나가서 평소대로의 촬영을 하고 왔다. 이게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나에게도 이제 평소라고 부를만한 것이 생기긴 했다. 어쨌든 오늘은 특별히 더 얘기할 것은 없다.

그래도 아쉬우니 기억나는 일 몇 개를 적어 보자면, 우리 집 앞 골목을 우체부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시는데 시간이 대충 오전 11시 근처인 것 같다. 다음번엔 비슷하게 맞춰서 한번 나가봐야겠다. 그 골목은 앞집의 폐지 줍는 할머니의 작업장이기도 하다. 어제인가 그제는 주워 오신 게 많았는지 길에 놓인 게 평소보다 많아서, 우체부 아저씨가 오토바이로 지나가시면서 조금 곤란해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앞집에는 할머니 말고도 아드님이 같이 사시면서 일을 하시는데, 촬영을 시작한 뒤로는 마주치질 못해서 아직 촬영에 대해서 말씀을 못 드렸다. 기회가 된다면 이런 걸 하고 있다고 말씀은 드려 놓으면 좋을 것 같다.

«20240712»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게 아무래도 쉽지 않은 것 같아서, 오늘은 한 번 녹음기만 가지고 나가보기로 했다. 그래서 드디어 작업에 쓸 만한 좋은 소리를 좀 건졌냐고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지만, 몇 가지 일은 있었다.

우리 집 바로 옆 말고 아래쪽 골목(전에 강아지 산책시키고 돌아오는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던)을 하루에 한 번씩 찍고는 있었지만 사람이 있었던 적이 별로 없었는데, 오늘은 한두 번 뵌 적이 있는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시길래 인사를 드리고 가서 촬영 허락을 구하려고 했다. 할머니는 먼저 내게 꽃이 참 예쁘지 않냐고 말씀하셨다. 집 앞 화단에 이름은 잘 모르지만, 작고 빨간 꽃이 많이 피어있었다. 할머니는 그 뒤로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그 꽃이 심겨있는 집은 옆집인데 원래 집 주인 할머니는 요양원에 가 계셔서 이 할머니가 지저분한 걸 치우고 흙도 갈아서 정리를 해놓으셨다는 것, 예전에는 저쪽 공원 있는 데 사셨는데 그때도 앞에 꽃을 잘 키워 놓아서 지나가던 경찰관도 구청 직원도 예쁘다고 얘기해 주었다는 것, 이곳에 이사 온 지는 1년 정도 되었는데 사람이 많이 안 다니고 시장도 너무 멀어서 살기가 좋지 않다는 것, 예전에 다니시던 복지관이 없어져서 슬프다는 것, 사람도 안 다니고 심심하니 괜히 나와서 화초에 물만 주고 다시 들어가신다는 것, 그런 이야기들을 정해진 순서 없이, 하셨던 말씀을 반복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해주셨다. 대화를 나눴다고 하기엔 내가 대답을 잘 해드리진 못했던 것 같고, 그냥 이야기를 듣고 난 다음, 인사를 드리고 오려는데 작은 빵 같은 것 두 개를 가지고 가라며 쥐여 주셨다.

앞집의 할머니는 일하시는 골목 앞에서 녹음기를 든 나를 보시곤, 전엔 그냥 어색하게 웃으며 지나가기만 하시다가 오늘은 말을 거셨다. 그건 다 쓰레기니까 찍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다음에 좀 있다가 풀 같은 것을 양손 가득 뜯어서 가지고 오셨는데, 상추와 민들레 잎이었다. 골목 반대편에 있는 작은 공터에 뭔가 심고 키우고 계시다는 것은 오다가다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상추와 민들레잎을 내 눈앞에 내밀고 계셨고, 내가 되는 대로 핸드폰을 꺼내서 20~30초 정도 촬영을 하는 동안 가만히 들고 계셨다. 여름에 입맛이 없을 때 이걸 뜯어다 먹으면 좋다고 얘기하셨다.

그 후 나는 다시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아래 골목 할머니가 키워놓으신 화분들과 앞집 할머니가 상추를 심어놓은 자리를 잠깐씩 찍어 놓았다. 앞으로 매일 촬영해야 할 것이 조금 늘어났고, 나는 마음이 약간 들뜬 상태가 되었다. 물론 사람들과의 거리가 조금 더 좁아진 것이 기뻐서 그랬지만, 좀 겁이 나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이 사람들의 삶의 무게를 다 알 수 없다는 것, 일부를 알게 되더라도 그걸 나눠서 감당하거나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다는 것, 이렇게 빠르게 좁아지는 거리를 책임질 수 없다는 것, 그런 것들이 겁이 났다. 물론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알고 고민하고 조심하는 것과 정말로 겁이 나는 것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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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5»

인천에 돌아와서 오후 4~5시쯤에 촬영을 나갔다. 저번에 찍었던 빨간 꽃을 다시 찍으러 갔는데 꽃이 봉오리만 남아있고 없어져 버렸다. 조금 있다가 할머니가 나오셔서 또 인사를 드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할머니 얘기를 들어보니 이 꽃은 아침이 되면 또 피었다가 금방 진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꽃 이름은 채송화였다. 내가 꽃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채송화라는 게 어떻게 생긴 건지 아예 모르고 있었다. 이렇게 생겼구나. 채송화는 이사 오기 전에 사시던 곳의 공원에 있던 걸 옮겨와서 심으신 거라고 했다.

할머니가 해주신 얘기는 저번과 반복되는 게 많았던 것 같다. 골목에 사람이 다니지를 않아서 살기가 좋지 않은 곳이라고 하셨고, 오늘 이 골목을 지나가는 사람이 내가 처음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근처에 시장도 병원도 없어서 살기가 불편한데, 저쪽 울타리 (지하도로 공사 중인 곳) 너머에 마트라도 하나 생겼으면 좋겠는데 그렇게는 안 될 것 같다고도 하셨다. 할머니는 성당에 다니셨었고 요즘도 기도를 하시는데, 하나님도 이제 나이가 먹어서 눈도 귀도 어두워지신 모양이라고 농담을 하셨다. 나는 할머니와 아주 재미있게 대화를 나눌 재주는 없고, 그냥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면서 열심히 듣고 있다는 티를 내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할머니의 얘기에 적당한 대답을 못 해 드려서 어쩔 수 없이 같은 얘기만 반복하시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럼 할머니는 내게 얘기를 하면 할수록 조금씩 더 지루해하시는 걸까? 아니면 그 이야기가 정말 몇 번이나 반복해서 확실히 전해주고 싶을 만큼 할머니에게 중요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오늘은 촬영하다가 앞집 할머니의 아드님(이라고 부르게 되지만 나보단 훨씬 나이가 많은 분이다)을 마주치게 되어서 촬영에 대한 허락을 구했다. 동네를 촬영해서 뭔가를 만들어서 10월에 서점에서 트는데 잠깐잠깐 찍혀서 나오게 되셔도 괜찮겠느냐고 물었고, 아저씨는 잠깐 생각을 하시다가 잠깐잠깐이면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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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6»

사실 어젠 까먹었었는데, 오늘은 잊지 않고 집 앞 골목을 쓸었다. 사실 쓸기 전에도 그렇게 지저분해 보이진 않았지만, 쓸고 나니 깨끗해진 게 좀 티가 나긴 했다. 이 정도 노력을 들여서 이 정도 변화를 느낄 수 있다면 청소 중에서도 효율이 괜찮은 편에 속하는 것 같다.

촬영은 아침에 잠깐 했다. 아래쪽 골목의 채송화는 아침이 되니 정말로 다시 빨갛게 피어 있었다. 오늘은 할머니는 나와 있지 않으셨는데, 아마 아침드라마 하는 시간대여서 그랬던 걸 수 있다. 집 밖으로 TV 소리가 조곤조곤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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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7»

오늘은 서점에 하루 종일 있었다. 마침 비도 꽤 많이 와서 골목을 촬영하기엔 좋지 않은 날씨였기 때문에 오늘은 서점 손님들의 소리를 녹음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동안 골목에서만 너무 많이 촬영을 하고 서점 쪽에는 많이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손님이 많이 없기도 했고, 온 손님도 대부분 금방 나가는 경우가 많아서 오늘은 뭘 많이 하지 못했다.

그래도 단골손님 아저씨 한 분께는 양해를 구하고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녹음했다. 아저씨는 옛날부터 이 동네에 사신 분이라, 오시면 배다리 예전 모습이나 사람들 얘기를 종종 해주신다. 그리고 동네에 아는 사람들도 많으신 듯하고, 나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자세히 물으실 때가 있다. 녹음 허락을 받으면서 간단히 이런저런 걸 할 거라고 설명을 드렸더니, 구청에서 지원을 받고 하는 건지 물으셨다. 그 후엔 이번에 새로 동장이 되셨다는 공무원분과 축하 통화를 하시다가, 요즘에도 지원금 같은 거 나오냐 이런 내용의 얘기를 잠깐 하시더니, 인사를 하라고 갑자기 나를 바꿔주셨다. 당황해서 어버버대면서 잠깐 통화를 했는데,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어쨌든 축하도 드리고 고생 많으시다고 감사도 드리고 그랬던 것 같다.

«20240718»

비가 정말 많이 온 날이었다. 비가 오면 아마도 마이크에 빗소리만 잔뜩 들어갈 거라서 쓸만한 소리를 수집하길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도 비 오는 풍경을 담아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늘 촬영하던 곳들에 갔다. 채송화를 찍으면서 할머니가 하신 말씀들을 조금 생각했다. 할머니는 내가 이 골목에 와있다는 걸 보지 못한다. 그래도 내가 TV 소리를 듣고 할머니가 댁에 계신 걸 아는 것처럼, 할머니도 어떤 식으로든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면 좋겠다. 다음에 촬영할 곳은 사실 방향이 달랐지만, 일부러 할머니 댁 앞 골목을 한 번 지나서 걸었다.

«20240719»

오늘은 해가 좋다. 집 앞 빗자루질을 하고 늘 하던 촬영을 했다. 이쯤 되니 같은 일을 매일 반복하는 것이 좀 지친다. 카메라 잠깐 들고 있다고 몸이 힘든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이렇게 하고 있는 게 무슨 소용이나 의미가 있나 하는 의구심 같은 게 생긴다.

그리고 사람들이랑 부딪히는 게 새삼 더 힘들어졌다.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나갔을 때 골목의 익숙한 할머니들을 한 번씩은 마주쳤다. 이미 촬영 허락도 다 받아놓았고 뭔가 찍거나 녹음을 하면 또 그러려니 하실 텐데도, 그 사람들을 향해 카메라든 녹음기든 드는 것이 많이 망설여져서 일부러 피해서 촬영을 했다. 오늘은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할머니는 오히려 반갑게 인사를 하시고, 꽃 키우시는 할머니께선 인사를 받지 않으셨는데, 인사를 받지 않으신 장면에만 내 생각이 계속 머무르는 것 같다. 이 할머니와의 관계가 뜬금없이 엄청 소중해져서 그런 건 당연히 아닐 거고, 아마 작업을 위해 좋은 소리와 영상을 확보해야 한다는 조바심과, 내가 사람들에게 갑자기 다가가서 인사하고 친한척하는 게 결국은 그냥 내 작업 때문이고 사실 사람들도 그걸 다 알고 있을 거란 부끄러움 같은 게 충돌하면서 불안한 마음이 커진 것 같다.

일단 주말엔 잘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계속 이렇게 망설이다가 좋은 소리를 충분히 얻어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있는 걸 가지고 또 어떻게든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20240724»

오늘 아침도 집 앞을 쓸었다. 집 앞의 골목은 한쪽으로 살짝 경사가 져 있는데, 이걸 높은 쪽에서부터 내리막 방향으로 쓸어 내려가면 빗자루질이 좀 편하다. 사실 집에 있는 빗자루는 손잡이가 짧고 부들부들한 실내용이어서 골목을 쓸기가 쉽진 않은데, 이렇게 경사를 활용하면 그나마 청소가 좀 편해진다. 처음에 집 앞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마당용 대빗자루를 사려고 검색을 했다가 생각보다 좀 비싸다 싶어서 그냥 있는 빗자루를 쓰는 게 낫겠다고 치기 어린 판단을 했더랬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만한 가격이 붙어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앉아서 빗자루질을 하면 땅바닥을 평소보다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점은 좀 좋기도 하다. 요새는 비가 많이 와서인지 콩벌레 한 마리가 죽은 듯 있다가 빗자루가 지나간 후에 몸을 둥글게 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죽은 지렁이를 두어 마리 보았다. 엉뚱한 곳으로 너무 멀리 와버려서 흙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나 보다.

오후엔 서점에서 서점 단골손님 두 분의 허락을 받아서 목소리를 녹음하고 뒷모습을 잠깐 촬영했다. 두 분 다 연세가 좀 있으신 남자분이고, 따로따로 오셨지만 서로 아는 사이이다. 이렇게 단골들끼리 마주쳐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가끔 있다. 대단한 내용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더라도 말이 끊기지는 않는다. 허락을 받았다곤 하지만 편하게 나누시는 대화를 이렇게 한참 녹음해도 되나 싶어서 소심하게 녹음기를 껐다가, 이야기의 내용이 재밌는 것 같아서 다시 틀었다가를 몇 번 반복했다. 두 분 중 한 분이 올리비아 뉴튼 존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셔서 유튜브에서 찾아서 틀어드렸다. 노래를 듣는 동안 다른 한 분은 젊었을 때 피아노 학원에 3개월 다녔던 이야기를 해주셨고, 아바의 노래를 좋아하셨다고 하시길래 이것도 찾아서 틀어드렸다. 올리비아 뉴튼 존은 한국 사람이랑 연애를 했었고, 아바의 여자 멤버들은 나중에 다 이혼을 했고, 이런 이야기들이 좀 더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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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5»

아침에 나가서 늘 찍던 몇 군데를 촬영했다. 촬영하는 동안엔 사람을 마주치지 못했기 때문에 또 비어있는 길만 찍게 되었다. 찍고 싶은 사람을 대놓고 찾아다니지는 못하면서, 그냥 누가 혹시 좀 나타나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만 바라고 있다. 이런 나를 두고 적극적으로 뭐라도 좀 하라고 이야기할 것 같은 몇 사람의 얼굴을 굳이 떠올렸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차이를 비웃는 몇 사람의 얼굴을 꽤나 오랜 시간 겪고 나서야 난 좀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카메라를 들고 있지 않은 동안에는 오히려 사람들을 좀 마주쳤다. 골목에 사는 할머니들과의 인사는 엄청 살갑진 않지만, 예전만큼 어색하거나 작위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아까는 강아지를 산책시켰던 할머니를 만나서 인사를 했더니, 이것 좀 가져가라며 쫀디기를 두 봉지나 주셨다. 같이 있는 일행 중 한 명이 마침 프랑스에서 누가 가져왔다는 초콜릿을 들고 있던 걸 할머니께 답례로 드렸다. 나는 괜히 뭔가 신이 나서 이거 프랑스 초콜릿이라고 두 번 정도 말씀을 드리고, 불란서 초콜릿이라고 한 번 더 말씀을 드렸다. 지금 생각하니 뭔가 좀 부끄럽다. 내가 가진 걸 드린 것도 아니면서, 그 순간엔 나도 할머니에게 뭔가 보답을 하는, 조금은 덜 이기적인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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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6»

오늘은 시간이 많이 없어서 간단히 촬영을 했다. 골목에서는 보이는 큰 쓰레기만 주웠다.

계속 촬영을 하다 보니 내가 카메라를 그냥 편하게 잡으면 골목이 약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듯이 찍힌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카메라를 살짝 아래로 내려서 찍고 있다. 안정적인 자세가 아니라서 팔이 약간 떨린다. 카메라를 얼마나 내려야 적당한 건지 아직은 정확히 감이 오지 않는다.

«20240730»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이 좀 더 급해지고 있다. 아직 작업에 쓸만한 영상과 소리는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매일 카메라를 들어도 더 이상 새로운 게 찍힐 것 같지 않다는 예감이 든다. 조바심이 나니 무리를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아까는 앞집 할머니가 화분에 물을 주시길래 바로 카메라를 들어서 찍었더니, 물 주는 걸 멈추시고 뭘 자꾸 찍냐고 말씀을 하셨다. 크게 나무라는 투라기보단 촬영이 계속되니 자연스레 느껴지는 민망함 같은 것을 표현하신 것이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거부감의 표현이라고 느껴져서 카메라를 금방 내렸다. 물론 예전에 설명은 드리고 촬영 허락은 받아 놓은 상태이지만, 허락할 당시엔 카메라라는 걸 ‘겪어보신’ 상태가 아니었으니 지금의 생각이나 느낌은 그때와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걸 알면서도 처음에 받아놓은 약속만 들이밀며 촬영을 강행한다면 좀 치사한 일인 것 같다.

촬영한 소스를 가지고 작업의 결과물을 조금은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되면서, 촬영하거나 녹음할 수 있으면 작업에 유용하겠다 싶은 것들이 몇 가지 생겼다. 아랫집의 할머니가 화분에 물 주시는 분무기의 소리를 가까이서 녹음하면 좋겠다거나, 문방구 아저씨가 일하시는 모습을 좀 더 가까이서 담으면 좋겠다거나 그런 것. 예정된 한 달의 촬영 기간이 다 끝나가고 있으니 이제 더 필요한 몇 가지는 그냥 의도적으로 접근해서 부탁을 드리고 찍을까도 생각했었다. 이곳의 일상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장면들이니 그중 몇 개를 계획적으로 담아내는 것이 윤리적으로 아주 어긋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러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카메라를 들고 나갔을 때 마침 그 장면들을 반갑게 마주치면 참 좋겠지만, 아니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비어있는 길만 계속 찍게 되는 이유는, 실은 이 길들이 대부분의 시간 동안 비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도 바깥에서 할머니들이 대화하는 소리를, 녹음기를 가지고 나갈 생각은 못 하고 듣고만 있었다. 내용이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한 분이 다른 분에게 왜 이렇게 오랜만에 모습을 보였느냐고 한참을 뭐라고 하셨다. 아마 반갑기도 하셨던 것 같고, 정말 걱정이 되셨던 것 같기도 하다. 그 걱정은 사람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골목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0240731»

오늘은 정말 촬영하러 가기가 힘들어서, 오늘 하루만 그냥 파업할까 하다가 그래도 꾸역꾸역 촬영을 하고 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뭔가를 매일매일 한다는 건 힘들고, 이게 왜 힘든지를 매일매일 생각해서 구체적인 말로 정리하는 것도 점점 힘들다. 처음 시작할 땐 잘 모르는 사람에게 촬영 허락을 받는 것이 가장 어렵고 일단 그 단계를 통과하고 나면 그냥 촬영을 쭉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쭉 한다는 것이 훨씬 더 힘들다. 막연하고 실체가 없어서 얼굴을 맞대면 금방 사라질 것 같았던 불편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명확해지는 것이다. 처음엔 비교적 너그러웠던 골목의 할머니들이 조금씩 더 카메라와 녹음기를, 그걸 들고 있는 나를 불편해하시는 게 아닌가 싶다. 일단 나는 확실히 점점 더 불편하다. 카메라를 쉽게 들지 못하는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이게 무례해지고 싶지 않아서 배려하는 것인지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 자체가 무서워서 숨는 것인지 점점 더 헷갈린다.

촬영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오늘따라 지하도로 공사장의 타워크레인이 좀 더 활발하게 움직이길래 쓸지는 모르겠지만 잠시 찍어 두었다. 타워크레인은 높고 커서, 공사장에서 떨어진 저쪽 골목에서도 보일 수 있게 얕고 오밀조밀한 오래된 지붕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채 동네를 살펴보는 것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도로공사는 매일매일 진행된다. 하지만 지친 내색도 않고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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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01»

아마 촬영은 내일까지만 하게 될 것 같다. 원래 한 달 정도를 계획했던 것이니 생각했던 일정대로 마무리되는 것이긴 하다. 작업을 생각하면 촬영된 내용은 턱없이 부족한데, 다음 주 정도까지 더 찍어볼까 하다가 상황이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 같아서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서점 손님들을 좀 더 찍어두어야 할 것 같아서, 오늘 하루 동안 내가 서점에 있으면서 촬영을 하기로 했다. 아예 출입문과 카운터에 촬영 공지를 붙여놓았고, 카메라를 들 때에는 되도록 다시 명확하게 허락을 구했다. 자주 보던 손님들은 조금 설명해 드리면 허락을 하시는데, 처음 오시는 손님들은 경계하며 거절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럴 땐 그냥 의사를 확인한 것일 뿐인데도 왠지 잘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손님이 들어오면 녹음기를 켜고, 나중에 녹음본을 확인할 때 헷갈리지 않게 대충 어떤 손님들이었는지 기록을 해놓았다.

  • 무협지 사러 종종 오시는 아저씨. 서점 온도가 좀 덥지 않은지 여쭤봤는데, 이야기가 좀 더 이어져서 에어컨 온도를 어떻게 조절해야 빨리 시원해지는지 나에게 꽤 자세하고 자신감 있게 설명을 해주셨다.
  • 이런저런 책 한두 권씩 자주 사 가지는 단골손님. 천 원 깎으셨다.
  • 웹툰이랑 만화책들을 주로 살펴본 젊은 부부.
  • 미술 관련 책을 구입한 손님 두 분. 아마 취미로 그림을 그리시는 것 같은데, 서점 테이블에 앉아서 미술 얘기를 포함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 나누셨다. 나가실 때 수다가 길어져서 미안하다고 하셔서 다들 많이 그런다고 말씀드렸다.
  • 드럼 배우는 책을 찾으셔서 없다고 하자 서예 관련 책이 어디 있는지 물어봐서 사가신 손님. 어쨌든 뭔가를 배워야 했던 것 같다.
  • 팝송 책을 찾으러 오셨는데 원하시는 것보다 너무 두꺼운 책이라서 안 사가신 손님. 다른 책이 없다고 했는데 좀 더 얇은 게 없냐고 재차 물으셔서 나도 모르게(사실 알았던 것 같다) 좀 퉁명스럽게 단답형으로 대답해서 죄송했다.
  • 도형과 삼각함수 대한 책이 있는지 물어보셨는데 정확히 뭘 찾으시는지 모르겠어서 큰 도움을 못 드렸던 손님. 꽤 오래 이것저것 살펴보다 그냥 가셔서 역시나 좀 죄송해졌다.
  • 우리 서점과 친한 건너편 카페 사장님. 감사하게도 매일 커피를 그냥 막 가져다주신다. 오늘은 앙코르와트 사진집을 사 가셨다.
  • 가끔 아버지와 함께 와서 마음에 드는 문제집을 딱 한 권씩 사가는 중~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 중년 부부 손님. 남편은 부동산에 관한 책을, 부인은 꽃 사진을 모아놓은 책을 찾으셨다.
  • 엄마와 아들. 어머니는 소설 코너를 유심히 보시다가 아들에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집에 가지고 있는지 물으셨다.

손님이 많지 않은 날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적어 놓으니 꽤 많다.

그래도 서점 일을 조금씩 하고 손님들을 살펴보면서 생각한 것은, 헌책방이 손님들이 (말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공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그게 어떤 지식이든 문화예술에 대한 취향이든, 먹고 살기 위해 부여된 사회적 역할을 벗어나는 내 모습을 소박하게나마 뽐내고 잘난 척을 좀 해도 괜찮은 것이다. 사실 헌책방 단골손님 중에서는, (무례한 추측일 수 있지만) 다른 곳에서는 경계의 대상이거나 적어도 배려의 대상일 순 있어도 공적인 대상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이 꽤 있다. 서점을 촬영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몇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촬영하는 기간 동안에는 그분들을 많이 보지 못했다. 요 얼마간 서점에 평소와 다른 다양한 손님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는데, 비슷한 시기 동안에 그 단골들을 본지가 점점 오래되어 간다는 것은 생각을 잘 못하고 있었다.

서점 촬영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골목에 늘 보던 할머니 두 분과 아마 다른 곳에서 찾아오신 것 같은 할머니 한 분이 앉아서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이제 촬영이 거의 마지막이니 한 번은 용기를 내봐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녹음기를 들고 가서 말씀하시는 목소리를 잠깐 녹음해도 되겠냐고 여쭤보았다. 처음 보는 할머니께서는 괜찮다고 하셨고, 다른 분들께는 저번에 허락을 구해놓은 상태라고 생각해서 녹음기를 켰는데, 다른 할머니 두 분이 동시에 나는 인터뷰 하기 싫다고 강하게 말씀하시면서 일어나서 자리를 피해버리셨다. 두 분 중 한 분은 아예 집 쪽으로 가셔서 이쪽은 보지 않으시고 화분에 자란 고추를 따기 시작하셨고, 다른 할머니가 좀 더 빨갛게 된 다음에 따는 게 좋지 않냐고 하시는데 그 얘기를 들으시는 것 같진 않았다. 죄송하단 말씀이라도 드리고 싶어서 그 자리에서 나머지 두 분 할머니 말씀을 들으면서 좀 더 기다렸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으셔서 그냥 두 분께만 인사를 드리고 돌아왔다.

밤이 되어서 내가 뭔가 착각을 했던 건지, 불편한 내색을 하셨던 것을 내 욕심 때문에 못 본 척하고 지나친 것인지 조금 생각해 보았다. 그저 오늘의 내가 너무 성급했던 것일 수도 있고, 애초에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내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 내 기억에 허락하는 대답을 하셨던 것은 맞지만, 그 대답이 아주 적극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뭘 허락받는 것인지 정확히 이해를 못 하고 대강 대답하신 걸 수도 있다. 아니면 내키지 않는데 내가 불편하거나 무서워서 거절을 못 하신 걸 수도 있다. 사실 이분들의 입장에서 나는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나타난 처음 보는 건장한 젊은 남자이다. 따로따로 있어도 어느 정도 겁이 나는 몇 가지 요소들이 적절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좀 억울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감정에 내가 지금 ‘서운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 이유를 어느 정도 알 것 같아서, 나란 인간 역시나 이 정도까지구나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약간 짜증이 나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내일은 마지막 촬영을 하는 날이다.

«20240802»

마음 같아선 오늘은 아침에 좀 이른 시간에 촬영을 하고 싶었는데, 어제 너무 늦게 자는 바람에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골목은 아주 더럽지 않았지만 괜히 한 번 쓸어 놓았다. 항상 찍던 두 군데의 골목과, 골목 끝에 있는 평상(사실 평상은 아닌데, 의자보단 커서 뭐라고 부를지 애매하다), 어느 정도 방치되어 있고 사람이 따먹을 잎은 좀 시들었지만 줄기는 문제없이 튼튼하게 살아있는 상추들, 오전 시간 동안 빨갛게 활짝 피어있는 채송화를 찍었다. 채송화 옆에는 어제 할머니가 따 놓으신 빨간 고추가 잘 어울리게 놓여 있었다. 그다음엔 공사장 옆길과 서점 앞 큰길을 찍었다. 마침 때가 맞아서 서점 사장님이 출근하시는 모습을 찍을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서점으로 가서 서점 안쪽을 잠깐 찍고서, 오늘 택배로 보낼 책을 포장하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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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계획했던 한 달의 촬영이 마무리되었다. 작업에 쓸 소리와 영상이 충분히 모여졌는지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해 봐야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일단 있는 걸 가지고 어떻게든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점의 몇 손님과는 전보다 편하게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골목의 할머니들 중 몇 분과도 그렇게 되었다. 어떤 분은 갑자기 먼저 내게 아무 얘기를 막 걸기도 하시고, 어떤 분은 인사하면 그냥 받으시는 정도이고, 어떤 분은 인사를 받지 않고 외면하신다. 하지만 적어도 인사를 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게 되었다. 집 앞 골목은 앞으로도 계속 쓸어 놓을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집들처럼 집 앞에 화분을 키우는 일은 내겐 여전히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풀은 살아있는 거니까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 부끄럽게도 아직 나는 풀의 목숨을 책임질 만한 사람은 못 되는 것 같다.

좁은 골목에 집들이 붙어 있다 보니 집 밖으로 소리가 나가는 것에 꽤 신경이 쓰인다. 과학적으로 정확한 건 아니겠지만, 내 경험상으로 스피커를 통해서 재생되는 소리는 볼륨을 꽤 크게 해놓아도 창문을 닫으면 그 너머로 많이 새어 나가지 않는다. 할머니들이 보통 귀가 많이 안 좋으시니까, 그분들 집 밖으로 새어 나오는 TV 소리는 사실 엄청 큰 볼륨일 것이다. 그런데 말하는 소리나 직접 울리는 소리는 같은 크기이더라도 훨씬 잘 퍼지는 것 같다. 밤에 혼자 집에 있으면 기타 연습을 종종 한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적도 있다. 그 소리가 밖에 들리는 게 부끄러워서 창문을 열심히 닫아놓았지만, 사실 밖에서 들으면 다 들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촬영 일지에 굳이 적어놓지 않았지만, 사실 이 오래되고 가난한 동네는 조용하고 평화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밤에는 누군가가 심하게 화를 내며 욕을 하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나가서 좀 말려봐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해봤지만 내가 즉흥적으로 개입해서 해결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고, 사실 그럴만한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이제는 밤마다 들리는 고함 소리에 꽤 익숙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직접 가서 말을 거는 것까진 아니어도 적어도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면 그렇게까지 마음 놓고 소리를 지르진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밖에서 욕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기타를 꺼내서 치기 시작했다.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고 있으면, 아마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끝없이 계속될 것 같던 고함이 좀 잦아드는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안정적인 이름표를 획득하는 데에 실패한 사람이고, 내가 뭐 하는 사람이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할 말을 찾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제 누군가에게 내 기타 소리를 들려줄 이유가 생겼다면, 나는 음악가인 것 같다.

(글 오재환, 그림 이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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